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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선수 이종범의 데뷔와 기록 그리고 스토리까지

by 하우스윗 2023.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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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범은 대한민국의 야구선수이며 해태 타이거즈로 데뷔하여 야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현재는 LG 1루 주루코치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야구선수 이종범의 역사와 국내 팬들의 평가 스토리까지 정리해 봤습니다.

<이종범의 역사>

한 선수가 경기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레전드입니다. 평범한 안타를 3루타로 바꿔버리는 마법사로 타자는 이승엽이 제일 잘하고 투수는 선동열이 제일 잘하고 야구는 이종범이 제일 잘한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야구 그 자체인 이종범은 1970년생 광주 출신입니다. 이종범은 광주 서림초 3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고 학교의 에이스이며 완벽하게 해내는 미친 야구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대회에서 팀의 우승에 가장 큰 기여를 어린 나이에도 모든 훈련이 다 끝났고 수익 연습을 매일같이 하는 재능과 노력 함께하니 실력이 수직 상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서 체벌이 너무 심했기에 아버지께서 야구를 반대했으나 이종범의 의지는 너무 강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집에 갈 때도 피가 흩어져 있었기에 앉아서 가지 못했습니다. 덜 아프게 맞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할 정도였고 오징어를 바지에 넣어 수선했다고 합니다. 광주일고에 진학하게 되었고 1988년 3학년 시절 청룡기 결승전에서 연장 11회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 끝에 주인공은 이종범이었습니다. 끝내기 3루타를 치면서 광주일고를 39년 만에 우승시켰다. 당연히 최우수 선수는 이종범이 받았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날아다녔던 이종범은 졸업 후 건국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게 됩니다. 고려대와 연세대 너도 이종범에게 입학 제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이종범 한 명만 원했습니다. 다른 동기들과 같이 야구를 하고 싶었던 이종범은 의리를 택했고 동기들과 함께 야구하기 좋은 여건을 갖춘 건대로 입학하게 됩니다. 대부분 선수들은 대학교 1학년부터 잘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이종범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이종범은 그냥 처음부터 정말 잘했습니다. 그 당시 대학 야구에서 가장 잘하던 투수가 1학년 신입생 이종범에게 연타석 홈런을 맞은 기록이 있습니다. 이종범은 그 경기에서의 활약으로 1학년으로 유일하게 국가대표에 선발되었습니다. 98년 아시아선수권 대회 대한민국이 공동 우승하게 되는데 mvp는 4안타를 친 이종범이었습니다. 

 

<이종범에 대한 국내팬들의 평가>

첫 번째 진짜 야구로는 대단한 선수입니다. 은퇴를 너무 안 좋게 하게 돼서 아들인 이정후가 기아는 절대 안 간다고 발언한 적도 있었습니다. 모든지 사람은 마무리가 참 중요하다고 느끼는 선수로 안타까운 기억이 있습니다. 두 번째 일본야구에서도 실력발휘를 했었습니다. 첫 시즌 유격수부문 올스타투표 1위를 했다는 거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인들 엄청 보수적이라 다른 나라 인정 안 함에도 뽑힌 게 진짜 놀라운 일입니다. 세 번째 진짜 왼손잡이라 좌타가 자연스럽게 훨씬 많은 힘을 공에 전할 수 있을 텐데 왼손으로 야구했으면 성적이 어땠을까 그리고 궁금하다는 생각과 동시에 이정후도 오른손잡이니깐 우타였으면 장타 얼마나 더 나왔을까 궁금해집니다. 네 번째 그 시절 투수들이 제일 싫어하던 타자였습니다. 스트라이크를 던지면 넘겨버리거나 안타를 쳤습니다. 볼은 기가 막히게 봤습니다. 선구안으로 인해 볼넷, 심지어 안타나 볼넷으로 내보내면 리드폭 쭈욱 나가서 죽겠다 싶은 것도 세이프 됐었습니다. 투구하면 1-2 구안에 도루시도해 성공 심지어 3루도 잘 훔쳤기에 해태타자들은 이종범이 나가면 1~2구째는 못 친다. 나가면 득점권까지 도루하는데 어떻게 치지? 한복판 스트라이크가 들어와도 기다려야지라고 회상을 했다고 합니다. 다섯 번째 어느 종목이든 한번 좋아하는 선수는 안 바꾸는 스타일입니다. 이종범이 등장하자마자 바로 팬 됐습니다. 그전에는 해태 팬으로서 정말 가장 재미있게 경기 본 게 이종범 해태시절이 이었습니다. 당시에 고등학교 때였습니다. 매일 이종범 선수 타율을 항상 체크하고 외웠을 정도였습니다. 여섯 번째 연습타석에 있을 때부터 사람들이 기대하게 만들었던 타자가 이종범이었고 수비위치에 모든 수비수가 다 뛰어들어갈 때도 기대하게 만들었던 게 이종범이었고 지고 있을 때도 할 수 있다 생각하게 만든 게 이종범이었습니다. 사십 년째 타이거즈 팬이지만 은퇴하고 타 팀 2군 감독으로 계시지만 언제나 타이거즈의 왕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저에겐 이종범입니다. 여섯 번째 90년대 후반쯤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당시 하와이로 전지훈련온 타이거즈선수들 연습경기장을 우연히 발견해서 찾아가 인사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때 당시 이종범 선수 김성한 선수 등등 너무나도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사인도 해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했습니다.

<이종범의 스토리>

1990년 세계 야구 대회에서 생애 처음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이때 5회 만에 사이클링 히트를 완성했습니다. 1992년 대학야구 추계리그에서 팀이 우승했고 타격왕은 물론 최우수 선수상을 싹쓸이했습니다. 이종범이 더 천재인 이유는 우투우타자로 초중고 대학교를 휩쓸었지만 알고 보면 왼손잡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 왼손 글로브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오른손으로 야구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종범이 가장 아쉬워했던 부분은 오른손으로 투구하되 왼손으로 타격을 해도 된다는 정보가 전혀 없었습니다. 좌타자가 되지 못한 게 한으로 남아 있었기에 오른손잡이인 아들한테 유일하게 했던 조언은 왼손으로 치라는 것이었다. 1993년 건국대 졸업 후 해태 타이거즈에 1차 지명되어 계약금 7천만 원에 입단하게 됩니다. 데뷔 시즌부터 이종범은 빛이 났습니다. 시즌 타율 2할 8푼 8을 기록해 신인이라고는 말도 안 되는 활약을 하였고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한국 시리즈 최다 도루 타이기록인 7개를 한 경기 최다 도루 기록인 3개를 하는 등 엄청난 활약을 하여 팀이 한국 시리즈 우승은 물론 한국시리즈 mvp와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였습니다. 신인왕도 노려볼 만했으나 양준혁이 존재했기에 실패하였고 1994년 2년 차 징크스는 이종범의 괴물 같은 실력으로 인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타율 3할 9푼 3위라는 말도 안 되는 기록이 나왔지만 4할대 타율을 만들지 못해 아쉬워했습니다. 4할 1푼 1위를 치고 있다가 생고기를 잘못 먹어 탈이 나 3경기 무안타에 그쳐 타율이 떨어졌습니다. 196안타로 1위 84 도루로 1위 113 득점으로 1위 출루율 4할 5푼으로 1위 war 11.77로 1위를 성공시켰습니다. 그중 84개의 도루는 kbo 야구 역사상 한 시즌 최다 기록으로 존재 중입니다. 1루에 나갔다 하면 무조건 도루를 뛴 정도로 상대팀 가장 싫어하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역대 타자 war은 1위를 기록 중입니다. 참고로 kbo 역대 타자 war 2위는 2015년 테임즈 3위는 2003년 심정수 5위는 96년 이종범입니다. 이종범의 빠른 발은 도루는 물론 광범위한 수비 범위를 보여주었습니다. 당연히 kbo mvp는 이종범이 차지했습니다. 그리곤 이종범은 전설이 됐습니다. 94 시즌 이종범이 kbo에 왕이 된 것처럼 28년 후 이정후도 kbo를 신성으로 등장해 유전자의 무서움을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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