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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신 김성근 감독님의 선수 시절과 지도자 그리고 과거 스토리까지

by 하우스윗 2023.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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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야구의 신이라고 하면 당연히 김성근 감독님을 떠올립니다. 한국 야구팬들은 김성근 감독에 대한 호불호가 나뉩니다. 선수 혹사 논란 그리고 구단과의 갈등으로 인한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선수들은 김성근 감독님을 하나같이 감사하고 아버지 같은 사람으로 표현합니다. 야구의 신 김성근 감독님의 선수시절과 지도자 그리고 과거 스토리 정리해 보았습니다.

<선수시절>

지도자 생활만 50년 이상을 해온 김성근 감독님은 1942년생입니다.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재일 동포입니다. 명문고등학교에서 야구를 하고 싶었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야구부가 있는 공립 교토 가쓰라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아르바이트를 하며 직접 학비를 벌었다고 합니다. 막일, 신문 배달, 우유배달까지 안 해본 게 없다고 합니다. 한국이라는 차별과 가난한 생활로 인해 악착같이 야구를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별명이 악마였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동기들을 훈련시켰고 김성근이 등장하면 또 왔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올해 나이 82세 12월 13일생입니다. 태어난 곳은 교토입니다. 180cm의 키와 몸무게는 82kg입니다. 1961년에 좌완 투수로 재일 교포 학생 야구단에 선발되었습니다. 그때 한국으로 원정 경기를 와 에이스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20살이 되어 동아 대학으로 스카우트를 받았고 그 해 우수 선수 상을 받았습니다. 그 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국가 대표에 선발되어 준우승이라는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기업 은행에 입단하여 영주귀국을 하여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습니다. 27살에 어깨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28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마산상고 감독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김성근 식 지옥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이땐 초보 감독이었기 때문에 더 심했다고 합니다. 선수가 쓰러지면 양동이로 물을 부어 일으켜 세웠다고 합니다. 선수들은 김성근 감독에게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까지 했습니다. 2022년 10월 일본 소프트뱅크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현재 최강 야구 감독으로 선임되었습니다. 최강 야구 PD가 찾아와서 감독 제의를 했으나 처음에는 거절했습니다. 그 후 최강 야구를 다시 보니 선수들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고 원래 야구를 했던 사람으로서 같이 놀아도 되겠다 판단했다고 합니다.

 

<지도자 시절>

최강야구 제2대 감독이 되었습니다. 첫 등장하는 장면은 한 편의 영화 같습니다. 이대호 선수가 먼저 등장하고 그 이후에 나오는 사람을 존재감이 없다고 했지만 김성근 감독님이 등장하자 다들 엄청나게 놀랐습니다. 오랜 기간 제자였던 정근우에게 오랜만에 펑고를 잡아줬는데 여전히 공은 안 잡고 쓰러지기만 한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정근우 선수는 40살이 넘은 나이입니다. 최강 야구 선수들은 은퇴를 하고 나이를 먹었지만 10대, 20대 선수와 같은 승부욕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마산상고 감독을 시작으로 기업은행 실업 야구단 감독 그리고 아시아 선수권 대표팀 코치, 충암고등학교, 신일고등학교 감독직을 맡았습니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고 OB베어스 투수 코치로 원년 우승을 했습니다. 2년 뒤 OB베어스 감독직을 역임하였습니다. 그리고 만년 꼴찌였던 태평양 돌핀스 감독을 맡아 포스트 시즌 3위로 진출시켰습니다. 그 후 삼성 라이온즈, 쌍방울 레이더스, LG트윈스 감독을 거쳐 레전드 신화를 썼던 SK와이번스 감독이 되어 한국 시리즈 3회 우승 준우승 1회라는 전설을 만들어냈습니다. 2015년 한화로 이적하여 선수 혹사, 노장 선호 성향 등의 논란과 프런트와 갈등으로 한국 야구와는 불명예로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김성근 감독님과 함께 했던 선수들은 혹사 논란에 대해 좋은 쪽으로 이야기했습니다. 투수들은 많은 시간 마운드에 나간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기회가 생기는 것이고 많은 훈련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활약하던 이승엽의 전담 코치였던 시절 이승엽은 훈련양으로 인해 매우 힘들었다고 합니다. 경기에서 4타수 4안타를 치고 훈련을 빠지고 선수들과 회식을 해도 되냐고 물었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합니다. 이에 분노한 이승엽은 훈련으로 화를 풀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30 홈런을 쳤을 때 따로 불러 맥주 한 캔을 주며 우리나라의 자존심을 살렸다고 얘기했다고 합니다.

 

<과거 스토리>

프런트와의 갈등은 여러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선수들을 보호하여 방출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팀에서 방출당하고 힘들어하는 선수를 항상 거두어줬습니다. 김성근에게 필요 없는 선수는 없다고 합니다. 항상 아버지의 마음으로 선수들을 대했습니다. 또 재밌는 사실은 많은 징크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몸이 아파서 진통제를 먹었고 그날 경기에서 이기게 되어 그 이후부터는 빈속에도 진통제를 먹어 간이 안 좋아져서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또 음식, 속옷, 양말, 핫팬츠, 삼각김밥, 유니폼, 화장실, 샤워, 엘리베이터, 악수, 자리, 쉬는 시간, 자전거, 장갑, 날씨, 투수 기용 등 정말 많은 징크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 기기 위해 목숨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성근 감독님은 신장암 수술과 심장마비가 온 적이 있습니다. 심장 마비가 온 다음 날 경기를 치렀고 그날 이겼다고 합니다. 본인이 아픈 걸 알리는 순간 경쟁에서 밀린다고 생각하여 밝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일본식 발음을 아직 못 고치고 있습니다. 고교 야구 시절 감독 시절 제자 뒤에 서있다가 야구 방망이에 맞아 앞니가 모두 부러지는 사고로 인하여 발음이 좋지 않다는 이유가 있지만 본인은 술집에서 한국말을 배워서 한국말이 늘지 않는 거 같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거의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에 와서 한국말을 잘하지 못하다 보니 내성적으로 바뀐 거 같다고 했습니다. 국가대표 감독이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제의가 정중히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음 날 다시 왔으면 받았을 거 같지만 다른 감독이 내정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본인이 감독이 되었다면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을 거라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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